며칠 전 해킹 피해가 있었습니다. 제가 10년 넘게 거래해온 출고 프로그램 업체 서버의 데이터가 날아간 것입니다. 해커는 업체에게 데이터 복구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요구했고 업체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지만, 결국 복구키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쌓아온 제 회사의 출고 및 매출 데이터는 한순간 0이 되었습니다. 상황을 보니 데이터 복구는 요원합니다.
하지만 해킹 피해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제가 20대부터 20년 간 운영해왔던 블로그가 해킹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간 쌓아놓은 글과 사진과 그림을 기록한 블로그가 해킹되면서 관리자인 제가 로그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를 증명하지 못하면 한 달 안에 블로그는 폐쇄된다는 안내문구와 함께였죠.
블로그 회사에 문의했지만, 고객센터에서는 제가 저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황당한 답변을 받았습니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 협조하겠다는 말에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블로그 회사의 갑질이라는 '소견'만 내놓을 뿐 수사권은 발동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저는 핑퐁게임의 탁구공이 되어 결국 지쳐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아, 나는 결국 2.7g의 탁구공에 지나지 않는구나.'
무력감이 밀려왔습니다. 블로그 폐쇄 날짜가 점점 다가올수록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20년치 쌓아놓은 글에 집착할수록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20년간 일기 쓰듯 써온 글들이 나의 동력이 되어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으니, 그 글들은 제 역할을 다 한 셈입니다. 그렇게 블로그는 폐쇄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5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 사이 지난 글들에 대한 미련이 없는 걸 보면 제 인생에서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나 봅니다. 오히려 찌질하고 궁색했던 20대의 글들을 들춰 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랄까요.
출고 프로그램 업체의 해킹 소식을 들었을 때 블로그 해킹 때만큼 동요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10년치 회사 매출 데이터와 입출고, 재고 데이터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렸지만, 살면서 이런 일이 비단 데이터에만 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한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일을 수없이 겪어왔으니까요.
흙이 바람에 쌓이고 없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지층으로 남아 지구의 역사를 보여주듯, 살면서 없어진 것들이 꼭 없어진 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물건들은 과감히 버릴 필요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더 이상 필요없는 것들이 자리를 차지할 때가 있더라고요. 버려야 채울 수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창고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의 재고는 일일히 수작업으로 파악해야 하는 일이 남긴 했습니다. 다행히 말복이 막 지났네요. 곧 선선한 바람이 불겠지요.
아피스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