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레터: 시간은 ctrl+z 되지 않아 다행이야

2024. 7. 1.

아피스토의 '풀-레터'

Jul 2, 2024
아피스토의 풀-레터 S1.5-14 vol.45

아이패드의 애플펜슬은, 연필처럼 쓸수록 닳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애플의 대단한 상술이다 싶었지만, 다른 펜촉들을 골라 써보면서 얘기는 달라졌습니다. 제가 쓰는 펜촉은 정품 펜촉보다 덜 미끄러지고, 쿠션은 무르며, 필압 조절도 힘들 뿐 아니라, 조금만 써도 펜끝이 찢겨나가고, 심지어 가격도 비싸지만, 이 펜촉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정품 펜촉부터 알리 펜촉, 닳지 않는 펜촉까지 골고루 써보았지만, 제 그림에는 이 펜촉이 궁합에 맞았습니다.

처음에는 닳아서 못 쓰게 된 펜촉을 그냥 버렸는데 요즘에는 그 펜촉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꼬질꼬질 펜끝에 때가 끼어 있고, 찢어져 있고, 뭉뚝해져 있지요. 몇날 며칠 아이패드와 사투를 벌이며 그림 하나 완성하고 나면, 온몸에는 온통~ 물감 투성이가 아니라 닳아버린 펜촉 몇 개가 남을 뿐입니다.

'왠지 허무하군.'

저는 어렸을 때 연필 쥐는 법을 잘못 배운 탓에, 엄지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으로 연필을 잡다보니, 그나마 영광의 상처라 할 만한 굳은살조차 박이지 않습니다. 펜촉은 사투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나만의 소중한 콜렉션인 셈이지요.

세계적인 아이패드 드로잉 작가 루이스 멘도는 아이패드 드로잉의 최대의 장점이 언두(Undo) 즉, crtl+z라고 했습니다. 수정해서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것. (맞지~) 아흔을 바라보던 데이비드 호크니도 아이패드가 출시되자마자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요. "아이패드로 뭐든 그릴 수 있네?!" 하며 좋아했다고. (어휴 말하면 뭐해~)

저에게 아이패드 드로잉은 식물적 상상력을 실현해준 도구입니다. 12인치 작은 화면으로 300인치 크기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한 달 동안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늘였다 줄였다 해가며, 20픽셀 단위로 점을 찍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뭐 하나?' 싶다가도 완성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벌써 생각은 다음 작품으로 가 닿아 있지요.

300인치 짜리 화면 크기의 그림이 12인치 안에 갖혀 있다가, 이번 <그리고, 그린>전을 오픈하면서 린넨 천으로 프린팅할 수 있는 최대 크기로 출력해보았습니다. 가로세로 130x90cm니 대략 60인치 TV 화면 크기입니다. 저 역시 제 그림의 풀컷을 이렇게 크게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의도했던 디테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에서 전에 느껴본 적 없는 희열을 느꼈죠.

지난주에는 미술을 전공한 형님 한 분이 전시장에 다녀갔습니다. 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비전공자다 보니 오히려 모사의 방식으로 형태를 (무식하게) 그려내는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스킬은 그릴수록 늘게 되어 있어. 그런데 스킬이 늘 때 오히려 그 세련된 스킬을 스스로 경계해야 해. 신선한 상상력이 스킬에 묻힐 수 있거든. 사람들은 작품을 볼 때 작가가 얼마나 잘 그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똑같이 그렸는지로 평가하지 않아."

그 말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기술보다 내용이 중요하지 않겠냐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글자를 파먹고 사는' 출판편집자로 일해오면서도 노안이 오지 않았는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하루아침에 노안이 왔습니다. 눈에서 손에 든 핸드폰 화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노안이 안 온 게 신기할 뿐입니다.

전시가 다음주면 끝이 납니다. 연이은 두 번의 전시, 그 대장정의 막을 내립니다. 그야말로 '대장정'이었습니다. 전시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언두(Undo)하지 않아도 좋을 꿈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니, 시간은 '언두' 되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아피스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