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초등학교 동문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30년이 훌쩍 넘어 처음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선 것이죠. 학교를 둘러보다가 건물의 뒤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복도의 창밖으로는 항상 강이 흐르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범람을 하고 겨울이면 꽝꽝 얼었던 그 강을 말이죠. 한참 동안 강을 바라보다가 문득, 성인이 되어 출판사의 편집자로 근무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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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장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자네 시를 쓴다면서?”

“네?”

시인이었던 사장님은 저의 대학 은사님과 친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석에서 사장님을 만난 은사님이 제가 이 출판사에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저를 시 쓰는 친구로 소개한 모양이었습니다.

“자네, 쓴 시 좀 가져와보게.”

“보여드릴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합니다만.”

“가져와봐.”

“네….”

저는 그날부터 그간 써왔던 습작 시들을 닥닥 긁어 모아 며칠 밤낮으로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봐도봐도 형편 없는 시들이었습니다. 결국 차일피일 미루자, 사장님은 한번 더 저를 재촉했습니다. 그냥 지나가길 바랐는데 물러설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퇴고를 거친 몇 편의 시들을 모아 보여드렸습니다. 시험성적표가 나온 날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을 겁니다. 몇 시간 뒤 사장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자네 시에는 물이 참 많네.”

“네?”

“물이 자네의 정서야.”

그날의 일이 졸업 후 처음 찾은 초등학교에서, 그것도 남한강 풍경을 보다가 떠오르다니요. 조금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지금 제가 물고기와 식물을 키우고 있는 것도 한편으로 우연이 아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강은 항상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강물에 손을 담근 적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입니다. 수영도 못할 뿐더러 낚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첫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금붕어가 화근(?)이었죠. 금붕어를 키운 것이 시작이 되어 지금껏 환수의 노예와 식물집사 노릇을 하며 손에 물 마를 일 없이 사는 걸 보면, ‘물이 나의 정서’라던 사장님의 촌평이 틀린 말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에 그 말을 듣고 ‘에? 물이라고?’ 하고는 저의 시를 다시 뒤적거렸습니다. 과연 한 편 한 편  들여다보니 사실이었습니다. 물에 손만 담그지 않았지, 시에서는 물속을 첨벙대고 있었습니다. 물을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삼은 시들이 넘쳐났으니까요. 그날 이후 저는 사장님에게 시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를 써오면 사장님이 조언을 했고, 조언을 듣고 다시 고치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1년 뒤 저는 한 문학잡지의 신인상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내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죠. 저에게 사장님은 고용주 이전에 시를 가르쳐준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사장님에게 사직서를 내밀던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는 흠칫 놀라며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나가서 뭐하려고 그러나?”

“제 출판사를 차리고 싶습니다.”

“허! 밖에 나가면 한대(寒帶)야, 이 사람아. 여기가 따뜻한 줄 알아야지.”

한창 회사에서 일머리가 생기던 30대 초반에 독립을 한다고 사직서를 냈으니, 사장님 입장에서는 기도 안 찼던 것이죠. 사장님은 앉은 자리에서 등을 돌렸고, 저는 사장님에게 큰절을 올리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사장님 말대로 ‘밖’은 추웠습니다. 추운 계절을 꽃 피우기 위해 정신 없이 일만 했습니다. 몇 년이 며칠처럼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저는 시인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시 한 편 쓰지 못한 채 생활인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한 뒤 3년차가 되던 그 해에 부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이 큰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퇴사한 후 처음 사장님을 뵌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장례식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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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키우면서 들었던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물도 식물을 만나야 순환을 하는구나!’

흙으로 스민 물은 식물의 뿌리에 흡수되어 줄기를 타고 오릅니다. 그 물은 잎의 숨구멍 밖으로 나와 수증기로 증발해버리지요. 하지만 수증기는 다시 비가 되어 흙으로 스밉니다. 물은 그렇게 식물의 몸 안과 밖을 돌아다닙니다. 식물의 안팎을 드나드는 물의 순환을 지켜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나에게 물의 정서란 유년의 강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키우고 있는 저 식물의 풍경이 아닐까’ 하고요. 식물의 물관을 따라 흐르는 물의 소리가 이제는 저의 서정(敍情)이자 한 편의 시라고 말이지요.         

하늘 물고기          

-신주현

물속에서 가장 높은 곳,

수면은 하늘입니다.

여름 한낮 

이불보만큼 두꺼운 수면을 뚫고

물고기는

반짝 솟았다 떨어지곤 합니다.

한 뼘 하늘을 범했던 찰나, 

지느러미의 미끈한 탄력

시침질해놓은 기억을 더듬어 

튀어오릅니다.

들실 날실 퐁퐁거리며

조각난 하늘을 이어 붙인 꿈을 봅니다.

꿈을 본 하늘 물고기는

물속에서만 삽니다.

낚시 바늘 같은 구원이

로또처럼 찾아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기발표작, <계간 다층> 겨울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