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재개발예정구역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식물을 구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재개발예정구역으로 향하는 마을버스 안에는 승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을버스가 가파른 골목을 오르자 이유를 알 수 있었죠. 집집마다 대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뜻의 ‘공가’ 표시가 되어 있었거든요. 이미 주민들이 모두 빠져나간 마을이었습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마을버스 회차 정류장에 내리니 몸빼바지에 헐렁한 라운드티를 입은 그녀가 저를 맞이했습니다. 

“이쪽으로 와보세요. 버려진 식물들이 많아요.”

익숙한 손놀림으로 호미와 바구니를 챙긴 그녀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 식물은 무늬둥굴레예요. 이 뿌리를 말려서 볶으면 우리가 마시는 둥글레차가 된대요.”

누군가가 키웠을 수국도 마당에서 여전히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남겨진 길고양이들이  도망가기는커녕 우리 일행을 따라다닙니다. 사람들이 없으니 먹을 것도 없는 모양입니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고양이들은 한눈에 봐도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따라다니는 고양이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동안 무심코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던 잡초를 밟고 있었죠. 그런데 그녀는 제가 밟고 지나갔던 잡초를 호미로 살살 캐내고 있습니다. 식물을 구조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건 원추리예요.”

“이름 없는 풀이 없군요?”

저는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은 이름표까지 붙이며 외우고 있었지만, 정작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은 잡초라는 이유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주민들이 버리고 간 식물들은 민망할 정도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는 풀을 보고 있으니 문득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이 사고로 20만 명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2만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체르노빌은 그후 유령도시가 되었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원전을 중심으로 반경 30km까지 출입이 금지되었죠. 지금까지도 이 지역의 출입제한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고 후 약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도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령도시가 거대한 숲으로 변해갔습니다. 가장 심하게 오염된 지역에서도 3년만에 식물들은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물이 방사능에 오염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은 데는, 식물은 필요한 세포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에 방사능에 세포가 손상돼도 죽지 않고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거죠. 움직일 수 없는 대신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터득한 셈입니다. 

체르노빌의 식물도 살아남아 숲을 이루었는데, 주인 없이 남겨진 재개발예정구역의 식물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식물들에게 가장 평화로운 한때인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차라리 마을이 이대로 보존된다면 식물과 어우러진 독특한 생태계가 탄생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했죠. 하지만 그런 상상은 낭만에 가까웠습니다. ‘식물의 마을’을 꿈꾸기도 전에 이곳은 재개발 공사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모과나무와 황매화, 오래된 등나무 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녀가 재개발예정구역을 다니며 식물을 구조하는 이유였습니다. 

재개발 단지가 존재하는 이상 구조 활동은 계속될 것 같았다. 우리 집에 와서 잘 자라준 식물들이 더 잘 보살펴줄 다른 집으로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이것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만들어 꾸준히 활동해야겠다는 계획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시작된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유기식물 구조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사실 식물들이 시작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이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나를 이끌어주어서, 우리와 함께 살아보자고 내게 손 내밀어주어서 시작된 것이다.

-백수혜, <여기는 ‘공덕동 식물유치원’입니다> 중에서

그녀가 구조한 식물들은 공덕동에 위치한 집으로 데리고 와 새 화분에 적응을 시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 이름을 ‘식물유치원’이라고 지은 것이죠. 구조된 식물들은 식물유치원에서 보호를 받게 되고, 화분에서 자리를 잡으면 비로소 식물들은 졸업을 합니다. 졸업은 식물나눔을 의미합니다. SNS를 통해 식물의 분양 소식을 알리면, 받고 싶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입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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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구조한 식물들이 어느새 우유 박스 하나에 가득찼습니다. 박스 안에는 옥잠화, 바위취, 둥글레, 우슬 들이 풍성합니다. 

“마음에 드는 아이 있으면 키워보세요.”

“요즘 무늬식물이 유행이니 저는 무늬둥글레로 할게요~.”

마치 잎 끝에 붓질을 한 것처럼 무늬가 생기 넘칩니다. 길가에서 자라는 풀의 잎을 이렇게 차근차근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싶었죠. 문득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창조하는 자에게는 가난이 없으며, 그냥 지나쳐버려도 될 만큼 빈약한 장소는 없다.” 저는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고 싶었습니다. “식물집사에게 손이 빈 적은 없으며, 그냥 지나쳐버려도 될 만큼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오래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식물의 종을 묻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글쓴이는 안 쓰던 화분에서 싹이 났길래, 신기하고 기특해서 물도 주고 볕이 잘 드는 장소에 옮겨 키웠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크더니 급기야 꽃까지 피운 것이죠. 그는 잡초일지도 모르는 식물의 이름을 도무지 알 길이 없자, 게시판에 식물의 사진과 함께 글을 남깁니다. 식물의 이름은 잡초로 알려진 한해살이풀 털별꽃재아비였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 글에 달린 익명의 댓글이 촌철살인이었습니다.

“기르기 시작한 이상 잡초가 아닙니다.”

이 댓글은 그후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실릴 만큼 명문장이 되었죠. 비록 한 해만 살다 갈지언정 화분에 심긴 털별꽃재아비가 그에게 잡초일리 만무했을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잡초가 아닌 무늬둥글레를 받아들고는 그녀와 인사를 나눈 뒤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집집마다 자라고 있는 장미넝쿨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닥칠 자신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요? 장미넝쿨은 군락을 이루며 담장과 담장 사이를 유연하게 타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생의 가장 평화로운 한때를 만끽하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