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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는 생장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순이 올라오는 부분입니다. 생장점을 자르면 줄기 끝은 성장을 멈추지만, 그 아래에서 다시 새순이 돋습니다. 특히 율마는 순을 하나 따내면 금세 두세 개의 새순이 돋아나죠.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말입니다. 이것을 율마의 순따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마는 부지런히 순따기를 하면 풍성한 수형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공상과 잡념이 머릿속을 돌아다녔습니다. 마치 율마의 순따기처럼,  생각을 하나 걷어내면 두세 개의 다른 생각들이 돋아났습니다. 곧 머릿속은 거대한 율마나무가 들어앉았지요. 이런 산란함은 곧 남들에게 산만함으로 비춰졌습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빠지지 않은 담임선생님의 코멘트가 있었어요. 
“매사에 산만함.”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산만함은 건망증과 함께 패키지로 붙어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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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아내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차 가지고 오시오.”
“고맙소.”

저는 문자를 받자마자 가던 길을 멈추고 회사로 되돌아갑니다. 집과 사무실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보니 차로 출근하는 날이 많지 않거든요. 가끔 차로 출근한 날도 깜박하고 걸어서 퇴근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차를 두고 걸어서 퇴근을 했습니다. 집 앞에 도착했는데 내 주차 자리에 차가 보이지 않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누가 내 차를 훔쳐갔나?!’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기억해냅니다. 깜박하고 차를 사무실에 두고 왔다는 걸요.
‘아, 오늘 차 가지고 출근했었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퇴근하기 위해 회사 건물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내 차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죠. ‘차를 어디에 주차했더라?’ 위아래층을 오가며 한참 차를 찾아 헤매다 결국 기억해냅니다. 

‘아, 오늘 걸어서 출근했지….’

건망증이라고 하기에는 상태가 심각합니다. 사실 건망증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습니다. 한 번 등교를 하려면 집으로 서너 번은 되돌아와야 학교에 갈 수 있었죠. 하나씩 두고 오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던 때도 퇴근 후 몇 번씩 사무실로 되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퇴근 전인 직원들은 제가 돌아오는 걸 보고 그냥 웃을 뿐이었죠. 다시 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건망증에 추가된 패키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과몰입 증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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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저는 글로스터 님과 함께 책 작업을 했습니다. 작업을 하다보니 책에 들어갈 참고용 사진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참에 식물 삽화를 직접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아이패드로 사용법을 익히고 그림 몇 컷을 그려보았습니다. 주변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책 내용에 맞게 그림들을 채워나갔습니다. 그중 책표지에 넣을 몬스테라 알보의 그림은 큰 사이즈로 그려야 했지요. 그림이 크다보니 원본 사진을 700배로 확대하여 픽셀 단위로 그려야 할 만큼 밀도가 높아졌습니다. 결국 이 그림 한 장을 그리는 데 꼬박 일주일 걸렸습니다. 문제는 밤과 낮이 뒤바뀌어도 모를 만큼 그리는 재미에 빠져들었다는 것입니다. 손목과 손가락이 저리는  손목터널증후군까지 왔지만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밥 먹는 시간에 그림을 더 그릴 수만 있다면!’

끊임없이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산만함, 물건을 항상 흘리는 건망증, 그리고 무언가에 집중하면 끊어내지 못하는 과몰입. 이 세 가지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었으니 바로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입니다. 저는 마흔이 넘어서야 내 머릿속에 키우던 율마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6년 전, 우연한 기회로 신경정신과 전문의를 만났던 적이 있었죠. 그런데 의사 선생님에게 들은 소견은 뜻밖에도 건망증과 산만함, 과몰입이 대표 증상인 성인ADHD였습니다.
제 입에서는 “네?” 하는 의문문 대신 “아!” 하는 장탄식이 새어나왔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의사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나하나 짚어봤습니다. 일러준 ADHD 증상에 내가 얼마나 부합되는지 살펴보았죠.
‘내 인생에 빠져 있던 퍼즐 한 조각이 여기 숨어 있었구나.’
잃어버린 성궤를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동안 물건을 잘 챙기지 못했던 이유는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서는 ADHD라는 증상 때문이었습니다. 이 생각들이 때로는 저를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한 것이죠.

“모든 일들이 병렬로 늘어선 느낌이에요. 할 일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노트에 우선순위를 적어보지만, 할 일들이 1열종대로 줄 서 있지 않고 1열횡대로 늘어서 있는 느낌이죠. 급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나마도 산만함을 이겨내면 그다음은 과몰입이 문제가 됩니다.
“산만하다보니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까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그런데 겨우 집중하면 이번엔 그 일을 끊어낼 수가 없어요. 밥때를 미루는 건 예사고요. 화장실도 못 참을 때까지 버티다 가거든요.”
의사 선생님에게 털어놓았던 그간의 제 고충은 ADHD의 가장 흔한 증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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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는 표현형 가소성(phenotypic plasticit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식물이 변한 환경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형태를 환경에 맞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늬식물의 경우 빛이 어느 각도로, 얼마만큼의 세기로, 어디에 비추느냐에 따라 잎의 무늬 형태와 색깔이 달라집니다. 집에서 키우는 식물이라면 식물집사가 빛을 조절하여 원하는 식물의 무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죠. 

한편으로 표현형 가소성은 식물이 그만큼 현재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무늬를 가졌다고 해도 식물은 지금 내 잎 위에 떨어지는 빛의 각도와 세기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래서 식물은 언제든 미련없이 ‘바보’ 무늬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식물에게는 단지 생존전략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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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성인ADHD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것 역시 현재에 집중하는 일이었습니다. 머릿속에 들어앉은 율마가 과거와 미래의 생각들로 새순을 내지 않으려면 스스로 현재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ADHD가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영역은 아닙니다.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유전과 환경 요인, 그리고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등이 ADHD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치료법 또한 의견이 분분하지요.

오늘도 제 머릿속에서는 율마가 끊임없이 새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도 어김없이 생각의 순따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습니다. 새순이 자랄 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내가 또 현재에 있지 않았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순을 따내기보다 ‘그렇구나’ 하며 지금의 내 상태를 들여다보는 것이죠. 그렇게 현재를 놓치지 않는 법을 배워나가는 중입니다. 변하는 환경에 맞춰 식물의 형태가 변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 역시 현재를 알아차리는 만큼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적응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