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의 한 식물원을 찾았습니다. 그날 말로만 듣던 할미꽃을 처음 보았습니다. 할미꽃은 정말 아래를 보며 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꽃을 소개한 팻말을 보니 왜 할미꽃이 아래로 꽃을 피우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할미꽃(학명:Pulsatilla koreana)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30~40cm까지 자라는 한국 토산종이다. 할미꽃의 꽃가루는 수분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꽃가루가 빗물에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래를 향해 핀다.
할미꽃 등이 굽은 이유는 꽃가루를 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줄기를 구부리면 꽃받침이 우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후대를 잇기 유리한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열매가 민들레 열매처럼 흰 털로 수북한 모양이 마치 노인의 풀어헤친 백발을 닮았다고 해서 할미꽃이라 부릅니다.
영미권에서는 할미꽃의 의미가 우리와 다릅니다. 할미꽃은 영어로는 패스크 플라워(Pasque flower)라고 부릅니다. 패스크는 ‘과거’ ‘넘어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사흐(Pessah)’에서 왔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모세가 유대인을 이끌고 이집트를 무사히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유월절은 ‘무사히 넘어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사흐’에서 따와 영어로 ‘패스오버(Passover)’라고 부릅니다.
유월절은 양력으로 대략 4월 경입니다. 할미꽃이 피는 시기도 이 즈음이지요. 할미꽃은 유대인이 목숨을 걸고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때에 꽃을 피웁니다. 할미꽃도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았으니 무사히 넘겼다는 뜻으로 ‘패스크 플라워’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할미꽃은 누가 봐도 나이 들어 보입니다. 노인처럼 등이 굽어 있으니 죽음의 문턱에 있는 듯합니다. 꽃이 지면 그동안 꽃받침 안에 지켜왔던 꽃씨가 긴 백발을 풀어헤치며 바람에 흩날립니다. 식물은 원래 꽃을 피우면 꽃씨를 날리며 시듭니다. 식물에게는 꽃을 피우는 순간이 가장 찬란한 한때인 것이죠. 하지만 할미꽃은 찬란한 순간에도 등이 굽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결국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4월의 할미꽃은 가장 찬란한 한때를 넘어가는 중입니다. 절정의 순간, 가장 낮은 자세로 씨앗을 품고 가장 찬란하게 백발로 흩날리는 중입니다.